<형무소ㆍ농촌 발로 누빈 추기경>
현장 신부들이 기억하는 故 김수환 추기경
(서울=연합뉴스) 송광호 기자 =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사회 곳곳을 살피고 다녔던 따뜻한 파수꾼이었다.
그는 구치소, 농촌, 경찰서 등 사회 곳곳을 어루만지며 '사랑과 평화'의 메시지를 전달했다.
◇설교보다는 듣기를 잘했던 '그' = 사형제 폐지에 앞장서고 있는 이영우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2002년 김 추기경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했던 순간을 떠올렸다.
당시 김 추기경은 사형수 10여명을 만났다고 한다. 이 위원장은 "추기경님이 사형수 한 명 한 명 일일이 포옹해 주시며 축복해주셨다"고 회고했다.
이어진 신부들과의 식사 시간.
김 추기경은 신부들에게 사형수로부터 선물받은 짚신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고 한다. 사형수들이 빵봉지로 만들어준 정성어린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.
퇴임 후 건강이 안좋아져 자주 구치소를 방문하지 못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형수들과 재소자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.
특이한 것은 재소자들을 만났을 때 그가 설교가라기보다는 탁월한 경청자였다는 점이다.
이 위원장은 추기경께서 "사형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했다. 일방적인 말씀보다는 사형수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셨다"며 "정이 많으신 분이셔서 그런지 그들 한 명 한 명을 감싸주었다. '회계하라'는 말씀보다는 사형수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고 하셨고, 그들과 함께 웃어주셨고, 함께해 주셨다"고 기억했다.
◇'농촌으로 농촌으로' = 천주교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조대현 신부는 "김 추기경은 아주 오래전부터 '우리 밀', '우리 농촌'에 관심을 기울여왔다"고 강조했다.
김 추기경이 지난 1991년 탄생한 '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'의 홍보대사 역할을 했고, 외환위기로 휘청이던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를 계속 유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.
수익성이 없다는 정부 관계자의 말에 "나는 수치는 모른다. 단지 우리밀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"며 정부를 설득하는데 성공, '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'를 존속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.
당시 농협중앙회는 지난 1998년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가 부도처리되지 않도록 이 운동본부의 자산 80억원, 채무 126억원과 함께 우리밀사업을 인수한 바 있다.
1993년에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를 창립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.
조 신부는 "추기경께서 당시 '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은 우리 믿음을 구체적인 삶으로 일치시켜나가는 일'이라고 강조하신 사실을 기억한다"고 말했다.
또 "'현장에서 생명과 이웃을 찾고,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활실천으로 생명의 밥상을 마련하는 일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'는 말씀도 기억한다"고 덧붙였다.
조 신부는 김 추기경을 이렇게 회고했다.
"추기경님은 평상시 농촌으로 자주 가셨습니다. 그분은 도시와 농촌간의 공생을 항상 말씀하셨습니다. 천주교가 농민들에게 다가서는 디딤돌을 놓으신 분입니다."
◇사회의 '파수꾼' 경찰을 품에 안다 = 지난 2000년 처음으로 서울지방경찰청에 경신실이 생겼을 때 김 추기경은 경찰을 방문했다. 항의 방문이 아니라 미사를 위해 경찰청으로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.
서울대교구 경찰사목위원회장인 강혁준 신부는 당시 김 추기경이 직장인의 고달픔과 피곤함에 대해 설교한 것으로 회고했다.
강 신부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경찰관들에게 '열심히 살아달라'고 주문했다. 특히 각종 시위로 피곤함에 찌든 '전의경들의 고생이 많다'고 위로하면서 어려움을 버티는 것은 의의가 있는 일이며 어려움은 자기를 승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교했다고 한다.
그 이후에 건강이 안좋아지면서 외부활동을 자제하게 됐고, 이로 인해 경찰청을 다시 방문하지는 못했다.
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찰청을 방문한 추기경이 떠나면서 한 말은 "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성당이군"이라고 한다.
강 신부는 "김 추기경의 방문 자체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이었다"고 회고했다.
buff27@yna.co.kr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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